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 내전 (문단 편집) == 제1차 그리스 내전 == > 그리스가 추축국에 점령된 뒤부터 해방될 때까지 영국의 그리스 정책은 크게 2가지 원칙으로 구분된다. 첫째, 그리스 국왕과 망명정부는 그리스 국가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 둘째, 영국은 전쟁 시기에 그리스에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승인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은 그리스에 주둔한 독일군을 저지하고 타격을 입히기 위해 그리스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릴라 조직을 활용하는 군사적 편의주의와 전후 그리스를 영국의 영향권 안에 포함시키려는 정치적 아젠다 사이에서 정책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전후 그리스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해 그리스 국민들의 비난을 받는 국왕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 >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p.118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하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그리스 망명정부는 영국군과 함께 [[아테네]]로 입성해 EAM과 EDES, 왕당파를 아우르는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연립 정부의 당면 과제는 공식적인 정규군 구성이었는데 EAM-ELAS,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 공산당은 자신들의 최대 권력기반이었던 ELAS에 대한 통제권을 순순히 내줄 생각이 없었다. 1944년 12월 1일 그리스 연립 정부와 영국군의 스코비 장군은 ELAS를 12월 10일까지 해산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EAM의 불만은 망명정부의 군대였던 신성대대 및 제3산악여단은 무장해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에 있었다. EAM은 양측 전체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12월 3일 [[아테네]]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총격으로 충돌이 시작되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데켐브리아나'''(Δεκεμβριανά, Dekemvriana)의 시작이었다. 경찰의 선제 사격이라는 명분까지 얻어 더는 거리낄 게 없어진 EAM-ELAS는 [[12월 3일]] 아테네에 3개 사단을 투입해 1개 보병여단과 1개 특공대대 규모의 '''자유 그리스군'''에 기반한 정부군을 가볍게 밀어내고 시가지 대부분을 점령했다. '''제1차 그리스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EAM-ELAS는 그리스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반응은 신속했다. 12월 5일 이탈리아에서 2개 [[인도 제국군|영국령 인도군]] 여단을 긴급 공수받은 영국군은 보급품과 증원부대가 들어올 아테네 시가지 활주로를 결사적으로 방어하면서 버텨냈고, 12월 10일까지 이탈리아에 주둔중이던 제4인도보병사단 전체를 추가로 전개시키면서 형세를 역전시켰다. 그리스 정부 역시 구 친독 보안대대 구성원들을 사면하고 정규군에 편입하여 전력을 보강한 뒤 반격에 돌입했다. 격렬한 시가전이 12월 내내 이어졌지만 영국군-그리스 정부군은 수적 우위와 항공 지원에 힘입어 1월 초까지 EAM-ELAS를 아테네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로 인해 미국에서도 그리스의 분쟁 상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고 영국 언론사 보도에서도 [[게릴라]]와 영국군이 나란히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려를 표했다. 이와 같은 사태에 큰 위기감을 느낀 처칠은 직접 그리스까지 가게 되었다. 처칠의 방문과 EAM의 아테네에서의 패배로 인해 [[1945년]] [[1월 15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ELAS는 [[파트라(도시)|파트라]]와 [[테살로니키]]에서 철수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동원을 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EAM의 명백한 패배였다. 전면적인 군사 공격으로 아테네 시가전을 촉발시킨 것도 모자라 도무지 변명할 길이 없는 참패를 당한 EAM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민투쟁보호단'''(OPLA)을 비롯한 산하 공산주의 계열 단체가 ULEN 정제소 일대와 페네오스 마을에서 그리스 정부 지지자들을 친독 [[부역자]], 반동분자로 몰아 각각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은 그리스 대중의 반공 정서에 기름을 끼얹었다. EAM을 주도하던 그리스 공산당에 대한 지지는 급격한 하락을 면치 못했고 영향력 있는 비공산 계열 참가 단체 대부분은 아예 탈퇴를 결정했다. 이 시점에서 EAM은 정치적 진영을 막론한 범그리스적 저항조직이라는 허울마저 상실하고 그리스 공산당(KKE)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